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프레드 대왕 (문단 편집) === 행정/문화적 업적 === 이처럼 알프레드는 비록 데인족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 했지만 바이킹에 휩쓸려 사라질 뻔 했던 앵글로색슨인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는데,[* 만약 그랬다면, 앵글로색슨족은 과거 자신들이 서쪽 고지대로 몰아냈던 [[브리튼인]]처럼 완전히 정복자에 동화되거나 혹은 [[아일랜드]] 방면으로 밀려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냥 전쟁만 잘하는 무인이 아니라 탁월한 행정가이기도 했는데, [[고대 로마]]가 몰락한 이후 사실상 [[이민족]] 최초로 [[왕권]] 확립 + 중앙집권 스타일의 통치체제를 마련했다.[* 알프레드보다 두 세대 정도 앞서서 유럽 대륙을 평정했던 [[샤를마뉴]]의 통치체제도 중앙집권형 통치체제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자세한 것은 샤를마뉴 항목 참조. 이외에는 [[서고트 왕국]]이 로마의 행정체계를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했긴 한데, 왕위계승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문제점 때문에 [[3세기의 위기]]마냥 로마식 체제의 단점까지도 흡수해 버렸다. ] 바이킹이 계속 침략하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왕권을 계속 강화시켜 나갔으며, 바이킹과 휴전한 후에는 자신의 지배영역을 10개 남짓한 주로 나누고, 각 주에는 각각 세속권력인 [[장관]]과 종교권력인 [[주교]]를 파견하였다. 통상적인 봉건주의 국가에서는 각 지역을 토착세력에게 맡겨 두고 국왕은 이들로부터 형식적인 충성맹세만 받았는데, 알프레드는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고 [[세금]]을 걷으며 징병을 실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었다. 심지어 정치권력 뿐만 아니라 성직자의 임명권과 파견권까지 국왕이 장악하여 종교 권력도 국왕의 손에 넣었다. [[9세기]]라는 혼탁한 시기에 중앙집권화에 성공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것으로, 알프레드 이후 [[유럽]]에서 제대로 된 중앙집권국가가 등장하려면 소위 [[절대왕정]] 체제가 시작되는 [[16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알프레드의 손자 [[애설스탠]]은 바이킹을 거의 몰아내고, 최초의 잉글랜드 통일왕국을 이룩하면서 할아버지가 개척해 놓은 중앙집권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 강화-중앙집권을 16세기 이후의 '사회적-제도적 기반을 갖춘' 중앙집권과 똑같이 여김은 적절하지 않다. 봉건주의는 기본적으로 왕권과 영주권이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체제이고, 따라서 왕이 특별히 무능하면 영주권이 성장하여 왕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처럼 왕이 특별히 유능하면 왕권이 성장하여 영주권을 억누르는 경우 역시 자주 있었다. 각 지역에 장관을 파견하여 통치하게 했다는 것 역시, 강한 왕이 등장하면 어떤 식으로든 세습영주의 권한을 억누르고 지방 통제력을 강화하려 했음과 같은 맥락이었다.][* 예를 들어 영주권을 존중하기로 유명한 유럽 봉건제에서도 영주위를 세습하려면 상위계층인 임금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왕권이 약할 때에는 승인이 단순한 요식절차에 불과하지만, 영주들의 불만을 억누를 수 있을 만큼 왕권이 강한 때에는 세습 승인을 대가로 복종을 요구하거나 반항적이거나 위협적인 봉신에게는 적당한 빌미를 붙여 영지를 몰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영주권을 억누르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br][br]이처럼 영주권을 억제하려는 시도의 완성이 '지방관' 파견, 즉 왕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인물로 영주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즉, 알프레드의 독창적인 고안이 아니다. 다른 왕들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때가 많았으나 알프레드는 성공시켰을 따름이다.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성립시키지 못했다고 하는 샤를마뉴 역시 세습영주 체제 자체를 뒤집기는 힘든 상황에서 교회에 많은 영지를 수여하는 것으로 대처했다. 가톨릭 성직자는 세습이 불가능하고, 설령 혼외자를 낳더라도 사생아로 취급하여 계승 등을 일절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주교에게 영지를 내려주어도 당사자가 죽으면 다시 후보자 없는 빈 영지가 생긴다. 그러면 임금은 다시 자기 입맛에 맞는 인물에게 주교령을 하사함으로써 자신의 편을 드는 영주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br][br]성직자의 임명권까지 왕이 장악했다는 것도 사실 11세기 후반 [[그레고리오 7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원래 왕이 성직자를 임명하곤 했다. 로마 제국 후기의 국가교회 전통 이래 교회 조직은 국가(정부) 조직의 핵심적인 요소였고, 따라서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가 주교 등의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 역시 당연하게 여겼다. 즉 성직자 서품과 임명이 교황과 교회의 권리라는 것은 그레고리오 7세 이후, 교황권의 전성기에 교황들이 세속 군주와 싸워서 얻어낸 것이었고, 알프레드의 시대에는 군주가 사제를 서품함이 오히려 당연했다. 위에 소개된 샤를마뉴의 사례에서도 세속 군주인 샤를마뉴가 주교를 임명하여 주교령을 설치했다.][* 즉, 알프레드는 역사를 뛰어넘은 중앙집권 개념을 구축한 인물이 아니다. 중세 군주로서 자신의 권리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여 중세 수준에서 권력 집중에 성공하였고, 알프레드의 아들과 손자 역시 선대의 유산을 충분히 유지할 능력이 있었기에 집중된 권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봄이 더 적절하다. 이렇게 권력을 권력 집중화에 성공한 데에는 바이킹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단결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 (샤를마뉴가 계속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계속 입증해야 했음과 달리) 비교적 폐쇄적인 섬 환경에서 기존의 앵글로색슨 왕국들을 활용할 수 있었던 당대 영국의 상황도 상당히 호재가 되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다만 [[10세기]] 후반부터 [[유틀란트 반도]]에 [[덴마크 왕국]]을 건설한 바이킹의 침략이 심해지면서 중앙집권화의 성과가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유럽에서 동로마 다음가는 수준의 중앙집권 국가였으나 결정적으로 1066년 노르만족에 의해 대륙에서 봉건제가 도입되면서 잉글랜드는 문치적으로 '''퇴화''' 버렸고[* 중앙집권에서 봉건제로의 역행 및 수많은 고대 영어 문학의 손실 등. 물론 단점만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축성 기술하고 군사 부문 같은 무치적으로는 확실하게 발전하게 된다. 게다가 중앙집권이라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 봉건제 같은 경우 왕이 죽어도 다른 영지 귀족들과도 싸워야 하지만 중앙집권제 같은 경우는 왕만 사로잡으면 왕국을 낼름 집어삼킬 수 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왕이 전사하자마자 앵글로색슨족들의 저항이 번번이 실패했던 이유도 당시 잉글랜드가 중앙집권 국가였기 때문이다.] 튜더 왕조 시기가 되어서야 다시 중앙집권으로 돌아온다. 알프레드의 업적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제도 정비와 더불어 문화와 종교의 부흥에도 힘썼다.[* 지역적 범위가 좁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군사/정치/문화 모든 면에 관심이 많았던 샤를마뉴와 여러 모로 오버랩이 된다.] 대표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손잡고, 각지에 주교를 파견하는 등 가톨릭 신앙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큰 산 하나만 넘어가도 말이 잘 통하지 않을 정도로 지역별 이질성이 강했던 고대 영어의 표준화를 시도했고, 기록을 위한 영문법을 정비하였다. 알프레드 이후 웨식스 왕국에서는 기록문화가 정착되어 많은 문헌을 남겼다. 그의 시기에 [[라틴어]]로 쓰인 책 다수가 [[영어]]([[고대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보에티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 등 라틴 저술가들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영국에 소개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본인 스스로도 라틴어를 배웠으며, [[자서전]]을 포함한 몇몇 저술을 남겼고, 그가 직접 쓴 문헌의 일부가 현존하고 있다. 이 시기에 기록으로 남겨진 문서들은 당대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1차 사료인 동시에 고대 영어 및 고대 게르만어 연구에도 대단히 소중한 자료들이다. [* 다만 안타깝게도 [[정복왕 윌리엄|북부 대학살]] 때 요크에 보관되어있던 고대 영어로 쓰여진 서책들이 대부분 불타면서 현재에 남은 것들은 그저 일부분에 불과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